[AI 부트캠프 일지] 1일차, 오리엔테이션
여기가 어딘가 싶다. 6시 정규 수업과정이 모두 끝나고, 싱크대 앞에 서서 팔팔 끓는 된장국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어딜 가고 있는거지? 아주 다른 세계로 들어왔다. 부트캠프에 "탑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데, 그것이 정말로 정확한 단어가 맞다. 사람들은 뭔가에 떼거지로 탑승했다. 이건 폭주기관차인데, 바퀴가 없다. 자세히 보면 바퀴가 있어야 할 자리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의 미친듯이 빠른 발이 보인다. 실재다. 모두가 정말로 탑승했다. 본인 발바닥이 닳아 없어지게 움직여야하는 폭주기관차에.
내 적성은 프론트앤드다. 데이터 전처리 통계 수학은 내가 평생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장르다. AI부트캠프에 등록한 이유는 순전히 AI관련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다. 만약 대학원에 떨어진다면 내가 완주를 해야만 할까 하는 고민이 남아있었는데 지속하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이 발바닥 땀나게 달리는 인간들의 폭주기관차에 타고보니, 이건 상상못했던 고통과 그만큼의 쾌감이다. 어떤 형태던간에 기차여행은 즐거운 것이 맞다.
많은 부트캠프 중에서 코드스테이츠를 고른 이유는 오래돼서. K-Digital Trainning 국비과정 혜택을 보기 위해 생긴 업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직접 수업을 들어보지 않고서야 진실은 알 수가 없겠지만서도, 생긴지 얼마 안된 업체들은 모두 걸렀다. 코딩 국비과정이 생기기 이전부터 천만원이 넘는 단위의 부트캠프를 원래부터 진행하고 있던 곳들을 찾았다. 사람들이 그만한 본인 돈을 투자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구름, 프로젝트라이언, 엘리스, 코드스테이츠가 후보였다. 몇 군데 다른 업체들도 찾아보긴 했지만, 코딩시험 없이 아무나 받는 곳도 걸렀다. 네이버 부트캠프와 같은 곳을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는 코딩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도 며칠동안 빡세게 공부하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나온다. 그정도의 시간투자와 열의를 가진 사람들을 1차로 걸러서 모으는 것은, 학생들을 위한 태도이기도 하다. 우후죽순 생겨나 세금을 먹기위해 아무나 받아주는 부트캠프 세계에서 고고하게 지키는 자존심이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첫 날 오늘 부트캠프를 겪은 평가는, 10점만점에 9점이다. (기대가 없어서 점수가 겁나게 높아진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새벽 2시고, 어제 잠은 2시간 밖에 못잤고, 과제는 기본과제밖에 못끝냈으면서!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점은 아이큐가 한 자리인 것으로 의심되는 답답한 나 때문에 깎았다.)
첫 시작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오전 9시에 시작하는 오리엔테이션에 진행자가 늦었고, 대체 진행자는 비몽사몽한 목소리인데 나보다 늦게 일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정상적으로 시작된 오리엔테이션. 그리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자습, 수업, 점심시간, 자습, 토론, 과제제출까지의 일정을 겪으면서 상당히 여러 번 놀라게됐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정교하고 치밀하게 똑똑하게 만들어진 커리큘럼이었다. 특히 과제와 질문, 전체적인 구성과 같은 것들이 그랬는데, 설계를 아주 똑똑하고 센스있는 사람이 했다는 생각을 했다.
온라인 zoom 강좌라는 것과, 하루 종일 7개월,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계속 같이 소통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각자 배경지식의 격차가 크다는 점, 낙오자라고 포기하고싶어지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점, 학습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점 등 매우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짜놓은 커리큘럼과 학습방식이다.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한시도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다. 절대 딴 생각도 딴짓도 할 수가 없다. 1-2시간 단위로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특히 놀라웠던 점이 난이도다. 심열을 기울여 만든 티가 난다. 난이도는 참여자 평균을 '아주 약간' 웃돌게 설계해놓았다. 초심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해결할 수 있는 난이도고, 코딩을 해봤던 사람들은 해볼만해서 기분 좋은 난이도다. 그리고 주어진 주제와 과제와 질문이 상당히 상당히 정교하다. 오전 예습에 나왔던 그 평균을 '아주 약간'웃돌게 설계해놓은 예제를 70프로만 응용해야 풀 수 있는 문제를 과제로 던져놓는다. 나머지는 밤 9시까지 알아서 해결해야한다. "이열..."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섬짓했다. 자습-zoom-숙제-zoom-숙제 반복하며 정신 못차리게 심화해간다. 3시 토론 주제는 "라이브러리와 매소드는 무엇일까요?"와 "Value Error, Syntax Error, Import Error가 무엇일까요?" 였다. 수업에서 다루기엔 지루하고, 짚지 않으면 장애가 생기는 개념어 정리를 소규모의 토론으로 절대 안까먹게 설계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인거다. 빛의 3요소는 무엇일까요? 르네상스 미술은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무엇을 하던지, 동기부여와 가치부여가 중요한 나 같은 사람은 왜 내가 이것을 해야하는지가 초반에 꼭 잡혀야한다. 그런 부분을 초기에 잡아주는 강의는 드물다. 그래서 나는 대학때 기술분야 수업을 끝까지 완주하기가 어려웠다. 주제가 흥미로워 접근하더라도 결국엔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나는 기계덕후가 아닌데요? 코딩덕후 아닌데요? 이거 해서 뭐하는데요? 선생님만 재밌는 것 같은데요? 하고 방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오리엔테이션이 만족스러웠다. (진행자의 컴퓨터 문제로 초기에 잡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 오프닝을 가치와 방향성을 중심으로 풀어낸 것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7개월의 과정이 끝이 아니라는 점, 강사들과 학생의 관계가 취직과 재취직과 이직에서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게 사실이던 아니던 이렇게 얘기함으로서 처음만난 학생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줬다.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동시에 수업을 듣다보니 여기서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한 언급이 많았다. 학생간의 기술격차를 미리 고지했고, 그러나 모두의 관심사와 진로와 습득해야하는 기술수준은 다르니, 비교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조건 도움을 청하라는 얘기. 그리고 7개월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서 목표점을 정확하게 보여줬다. 오전 OT는 그렇게 큰 그림에 대한 설계로만 이뤄져있었는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또한, 매 시간 주어지는 학습과제 역시 초기에 목표설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늘 배워야만 하는 것에 대해 반복해서 알려준다. 표지판만은 새빨갛게 또렷하게 적혀있는 것이다. 정신줄은 놓아도, 길은 잃지 말라고.
실제로 부트캠프 일정이 시작하기 전에 코드스테이츠에서는 여러차례 설문조사를 했는데, 거기엔 학생들의 학습 성향에 대한 MBTI같은 질문들이 있었다. 학습성향으로서의 E/I와 N/S와 F/T와 T/J를 구분 하는 것 같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기술만 대충 가르치고 말 생각이 아니다. 어떻게든 짜내겠다는거다. 폭주 기관차에 태워서 회초리를 마구 때리면서도 낙오자를 하나도 없게 만들어 더 빨리 달리게 할까만 생각하는 아주 사악한 태도다. 조금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고 이슈를 꼭 우리에게 공유해주세요. 저희가 도와드립니다~ 라고 적극적으로 친절하게 어필하는데, 그 의도가 사악함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진짜 사악한 것은, 폭주기관차를 잘 다스려 만들어놓으면, 7개월간 알아서 굴러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져있다. ENTJ의 사악함 같은 것이랄까..? 물론 나는 잉어킹으로 쥐어짜지는 것을 좋아한다.
아. 아침의 워밍업 자료는 당황스러웠다. 영어다. 첫날부터 나를 이렇게 압박하다니. 해보자는건가? 배부받은 페이지에 [첫 warm-up으로는 EDA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써있고 이걸 보란다. https://youtu.be/NEvuulahg2g [다음으로는, 데이터분석 라이브러리인 Pandas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라고 써있고 이걸 보란다. https://youtu.be/RlIiVeig3hc 아니....... 서류심사때 영어시험이 있었나..? 계속 떠올려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하............. 정말................혼자 모니터 보고있으니까 이해 못했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학생들을 배려하지 않는 이런 용기있는 태도 아주 칭찬한다. 이건.. 대학교 1학년 파운데이션 과정을 다시 하는 B형간염 걸릴 것 같은 쾌감이고, 고등학교 3학년 4시간짜리 3타임씩 하루 12시간씩 질주하며 입시학원 다녔던 그런 쾌감이다. 영어까지도, 적당하고 사악하게 난이도와 양까지 조절하며 계속 이렇게 스파르타로 굴려줬으면. 국비로 AI부트캠프를 했더니 덤으로 원어민이 되었어요. 같은 후기를 쓰고싶다.
아쉬운 점은 난독증이 있다면 완수하기 어려운 과정이라든 것이다. 모든 자료가 컴퓨터에서 디지털 문서화되어있다. 코딩은 컴퓨터로 문자를 작성하는 것이니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겠지만, 나는 디지털 문서를 읽고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주 약간의 배려가 필요한 지점이다. 인쇄된 스프링 노트 한 권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예습을 하고나면 선생님이 실강에서 다시 한 번 복습을 해주는데 그게 불과 30분밖에 되지 않는다. 나처럼 문해력 이해력 독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글이 아니라 말이 필요하다. 말로 300프로 효율적으로 이해하는데, 말로 듣는 시간이 적다.
기술 블로그로 만들었지만, 기술이 없어서 기술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추가 과제도 포기하고 여기에 글을 쓰고있다. 인상적인 하루 였으니 쓴다.
하루종일 공부를 했는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런데도 뭘 배웠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표지판은 기억이 난다. 나중에 길을 잃었을 때 색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코딩은 무척 재밌다. 20대때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늦지 않았지만.
딱 하루치 이야기다. 여기에 적어놓은 생각은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다. 나 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내일 달라질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타이트함이 변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지쳐 오늘의 글을 부정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이제 자야지. 새벽 3시다. 내일을 준비해야한다.